[와이뉴스] 1923년 일본은 감화령(感化令)을 발표하고 1924년 10월 1일 함경남도 영흥에 조선총독부 직속 감화원(感化院)으로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치했다.
설립 목적은 8-18세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불량 행위에는 항일 독립운동도 포함됐다. 이후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 늘어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일제에의 불만이 더욱 고조됐다. 또 거리에는 유리걸식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증가해 갔다.
일제는 1938년 10월 전라도 목포 고하도(古下島)에도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했다. 1942년 감화령을 더욱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선감학원(仙甘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했다.
조선총독부는 선감도에 거주하던 주민 중 선감학원 운영에 필요한 보조 인원 15가구 70여 명만 남기고 거주하던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그곳에 선감학원을 설치했다.
1942년 4월 200명의 소년을 처음 수용했다.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1946년 2월 1일 경기도로 관할 기관이 이관됐다.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돼 1970년대 말까지 존속됐다.
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선감학원은 실제적으로는 어린 소년들의 조선 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전쟁 소모품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탈출을 기도하다 사망하거나, 구타 또는 영양실조로 죽은 경우, 굶주림에 초근목피를 씹다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 등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되었다.
선감학원 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선감학원 희생자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9살(1955년)에 선감학원에 입소해 10년 동안 생활하다, 19살 때 수영으로 섬을 탈출했다. 당시 유일한 탈출구는 화성시 마산포였다. 험한 물살을 헤엄쳐 탈출해야 했고 도중에 5명 중 3명은 목숨을 잃었다."
-자료 참조: 디지털 안산문화대전 등
※ 촬영: 2024.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