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기_어때] ⑮평택시_암행어사 박문수 문화관

 

[와이뉴스] 박문수는 조선 후기 영남별견어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경기도관찰사 임명, 평안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91년 9월 8일 외가인 경기도 평택시 진위현에서 박항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 고령 박씨, 외가 경주 이씨, 처가 청풍 김씨다. 

 


부친 박항한은 박문수가 여덟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조부 박선과 백부 박태한은 이 두 해 전에 세상을 떠나 박문수는 자연스레 외가 쪽의 지원에 의해 성장한다.


박문수가 유일하게 암행을 한 것은 1727년 영남별견어사 때로, 박문수가 암행어사 직을 수행한 기간은 실제 1년도 채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공주 향리 생활로 백성들 어려움을 잘 알아 인사, 세정, 군정, 형정 등에 여러 개선안을 냈다. 왕족들이 미개간지를 선점해 수조권을 행사하는 절수(折收) 개혁도 과감히 진언했다.

 


별견어사 업무지침은 “수시로 암행하여 민간의 어려움을 탐문하되, 불법 수령은 파직시켜 각 읍을 숙연하게 하라”였고, 이에 따라 박문수는 철저한 염찰 업무를 수행해 수령 41명을 조사해 13명의 파직을 이끌었다고.


박문수가 극심한 흉년에 시다리는 마을에 어사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박문수는 백성들 구제 사업을 소홀히 한 수령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고 자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박문수는 경기 남양주 능내 별장(마현마을)에서 만년을 보내다 서울 취현방(중구 정동)에서 1756년 4월 24일(영조 32년) 66세로 별세했으며, 그의 묘지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에 위치한다. 


영조는 박문수 사후,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고 술회했다고 전한다. 


조선조 암행어사는 600여 명임에도, 박문수만이 '고유명사처럼'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위민과 애민이 민심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암행어사 박문수 문화관(관장 장승재)은 2020년 11월 평택시 진위면에 개관했다.


다음은 어사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할 시 작성한 시문이라고 한다. 박문수는 33살(1723년)에 문과에 합격했으니 그리 이른 편은 아니었다. 

 

 

낙조落照
落照吐紅掛碧山 낙조토홍괘벽산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빛을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 한아척진백운간
찬 하늘에 까마귀는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問津行客鞭應急 문진행객편응급
나룻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閑 심사귀승장불한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가 한가롭지 아니 하네


放牧園中午帶影 방목원중우대영
목장 가운데에 소는 그림자가 길고 


望夫臺上妾低鬟 망부대상첩저환
누대에서 남편 기다리는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는 나지막하다


蒼煙古木溪南路 창연고목계남로
푸른 연기에 싸인 고목 계곡의 남쪽 길에


短髮樵童弄笛還 단발초동농적환
단발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오더라 

 

 

-자료참조: 평택시,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한필 "박문수의 어사 이력과 별견어사 활동", 장승재 <암행어사 박문수> 등
※ 촬영: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