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순사건 상흔을 찾아가다

황순경 (사)여순사건여수유족회 회장

해당 기사는 황순경 사단법인 여순사건여수유족회 회장의 구술과 현장 답사 등을 통해 이뤄졌음을 밝힌다.

△ 황순경 사단법인 여순사건여수유족회 회장이 앞선 14일 오후 전라남도 여수시 공화동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황 회장은 여순사건으로 당시 23세였던 큰형과 경찰로 근무하던 외삼촌을 잃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징용에서 얻은 질병으로 귀국 후 숨졌다. 황순경 회장은 조속한 특별법 제정으로 유가족의 명예회복은 물론 국가 폭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달래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살당해 더러는 불태워진 원혼들의 눈물인가. 그 날은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황순경 여순사건여수유족회 회장이 차를 몰고 안내한 곳은 산을 깎은 터널이 한 차선으로 이어져 있는 곳을 지나는 적잖이 구부러진 해안 도로였다. 내리는 비안개와 뿌연 바다에서의 옅은 해무가 더해져 위령비 주변은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순사건의 발원지인 여수의 이 위령비는 사건이 번져나간 인근 지자체에서 목격한 위령탑보다 규모가 현저하게 간소했다.

이어서 십여 미터 떨어진 형제의 묘를 찾아갔다. 그곳도 마찬가지 바다를 바라보게 위치한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했다. 색이 바랜 콘크리트 계단이 물에 젖어 짙은 무채색을 띠는 계단을 수미터 올라가니 둥그스름한 봉분이 있고 그 앞에 작은 상석이 보인다. 우측으로 그보다 삼 분의 일 정도 크기의 봉분이 하나 더 있다. 약간의 수풀이 우거져 있다.

그뿐이었다. 더는 없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자국 군인에 의해 끌려가 총살당한 후 더러는 불에 태워지고 다른 시신과, 한때는 한 마을에서 함께 농사 짓고 경사에 잔치를 열어 기뻐했을 이웃들과 마구잡이로 묻혔다.

1948년 10월 19일.

70년도 넘은 일이다. 황순경 회장이 3남 1녀 중 장남인, 당시 23세였던 큰형의 부음을 받은 건 꿈 많을 아홉 살 시절이었다. 여순사건이 터지고 삼 일 정도 후였다. 당시 여수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형은 여순사건이 터져 열차가 운행이 정지되자 8km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그 날은 퇴근길이었다. 직장 동료였던 또래의 마을 주민 두 명과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미평역 인근에서 정부군의 공격을 받았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려던 그에게 정부군은 총을 쏘았다. 당시 결혼 1년 차인 스물세 살의 청년이었다. 대한민국 군인이 대한민국 국민의 배에, 황 회장의 설명대로라면 배꼽 조금 위에 맞은 총알은 복부를 뚫고 등 뒤로 나왔다,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나머지 두 명 일행은 그들이 든 총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피가 흐르는 몸을 기듯이 이끌고 동리로 돌아와 황 회장 일가에 장남 황순헌 씨의 피격 사실을 전했다. 혼비백산한 가족들은 부랴부랴 나무를 깎아 들것을 만들어 황순헌 씨를 데리러 갔다. 4km 거리였다. 현장에 도착하니 황순헌 씨는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황 회장의 가족과 동행한 마을 사람들은 참기 힘든 황망함과 슬픔으로 오열하며 황순헌 씨의 시신을 마을로 데려왔다. 쉰 후반의 모친은 그 후 한 달간 곡기를 넘기지 못했다. 일행 셋 중 한 명만 숨기자 고인이 좌익단체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순 사건은 1948년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군부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사건으로 정의된다. 지리적으로 여수는 제주와 비교적 가깝기에 당시 여수에 있던 제14연대는 1948년 10월 15-16일경 제주 파병 계획을 하달받는다. 이 사건은 해방 직후 여수 순천 지역에서의 좌우익 이념 갈등이 배경이 되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두고 대립의 폭은 커져갔다.

숙군의 위협과 제주 파견에 반대 의사를 지녔던 지창수를 비롯한 14연대 일부 군은 항명을 결정했다. 참여 인원의 수는 대략 1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소식은 19-20일 새벽 상부에 전해지고 20일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 광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 조직이 결정돼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21일 여수 순천 지역은 정부 계엄령이 발포됐으며 27일 진압군에 의해 장악됐고 여순사건은 종결됐다.

진압 과정에서 군은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민가 수색 등이 시행돼 상당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피해 통계는 다양하며 대략 2천여 명 정도로 전해지나 황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전라남도 피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1만 1천300여 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외 집계되지 않은 행방불명자도 다수라고 전해진다.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 처벌은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됐으며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 교전을 벌이며 활동했고 이는 1950년 초까지 지속됐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 인명피해도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 모습이다. 묘지 입구에는 사건 당시의 상황이 기술돼 있다. 일부를 전하면 이렇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증언했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했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한다.”

“조속한 특별법 제정으로 원혼과 유족들의 명예 회복해야”
황순경 회장은 유족회 내부에도 행방불명으로 가족을 잃은 회원이 다수 분포한다고 전한다. 그들은 원인도 모른 채,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선량한 시민으로 희생됐다. 때로는 확실하지 않은 밀고로 목숨을 잃었다. 남은 가족들은 사라진 가족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을 있게 해준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며 6살 어린 나이에 4살 동생과 할머니 손에 자란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 후 재가했다.

황순경 회장은 행정안전부에 계류 중인 여순사건 특별법안을 이번 20대 국회 임기 안에 조속히 통과시켜 한 맺힌 피해자들의 원혼과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유가족뿐 아니라 여수 시민 다수도 동의하는 사항이라고. 더불어 적합한 배상과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창한다.

같은 해 이보다 앞서 일어난 제주 4.3사건 특별법(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 1월 12일에 공포된 것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거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로 몰려 사살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삶은 오죽했을까. 평생을 부역죄 가족이라는 누명에 시달리며 연좌제로 자제들의 취업에도 제한을 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여순 사건은 연관돼 앞서 일어난 제주 4.3사건에 비해 아는 이가 적다. 군 내에서 명령 불복종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경찰도 관계가 돼 있으며 친일파 척결 문제도 불가분이라서 등등의 이유로 국방부에서, 관련 시민단체들에게서 특별법 제정에의 강력한 반대를 빈번히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황순경 회장은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최초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여수임에도 인근 순천, 구례에 비해 턱없이 보잘것없는 위령비가 산 중턱에 덩그러니 있을 뿐이라고, 제대로 된 추모 공원 하나 짓지 못하고 있노라고.

1948년 10월 19일.

순박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유가족회 부회장의 부친은 정부군이 해당 마을을 지나갔다는 동네 사람의 전언 하나에 마을 사람 수십여 명과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재심이 열리는 이유다.

비록 상명하복의 군기가 가득한 더군다나 해방 후 미군정 시대의 엄혹함이 감도는 시기였지만 자국의 주민을 사살하라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은 정당했노라고 황 회장은 전한다. 차마 분단국가에로의 명확한 선을 긋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동참하지 못하는 선량한 시민을 자국민으로서 제압할 수는 없었노라고 결정한 항명은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여순 사건은 여순반란사건으로 지칭됐으나 1995년부터 ‘여수순천사건’ 명명됐다. 황 회장은 ‘항쟁’ 첨입을 고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신의 실수는 누구나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높은 권력, 설혹 그것이 차가운 강철로 된 무기라 할지라도, 을 지닌 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 연락이 닿은 5.18민주항쟁 부상자는 말했다. “명령 하나에 죽고 사는 군인들인데 그들이라고 자국민을 총칼로 죽여놓고 마음 편하겠어요.”

그래, 어쩌면 아주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아니라면 그들은 역사와, 이제는 고령이 돼 대부분 건강 악화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통렬한 사죄와 반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자그마한 위령비에 눈물 같은 소담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여순사건여수유족회 황순경 회장 인터뷰 및 위령비 모습 바로 보기 >>  https://tv.naver.com/v/8771462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