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행복은 스스로 찾아서 만드는 것”

김호상 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 UN장애인권리협약위원회 한국위원

음주운전 차량에 의한 교통사고였다. 의식을 잃은 채 수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깨어나 보니 김호상 대표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돼 있었다. 상대측은 음주 상태로 운전한 대형 차량이었으며 김 대표는 소형 차량 운전자였다. 김 대표의 부친은 아들의 무고를 위해 끝끝내 가해자를 찾아냈으나 김 대표의 건강한 신체까지는 되찾을 수 없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친, 갓 제대한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었다. 사고 전 김호상 대표는 검도 선수로 활동하며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 후 10여 년 김 대표는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운 ‘자신과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더는 없겠다’. 김 대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고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이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사회복지학,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수료하고 현재는 사단법인 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선진국을 다니며 그곳의 장애인 인권 복지현황을 벤치마킹하고 국내 관련 조례 등을 제·개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앞선 5일 오후 부산시 금정구 중앙대로 포럼 사무실에서 김호상 대표를 만나봤다.



△ 김호상 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가 앞선 5일 오후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장애를 입고 나서도 사회복지학,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수료하는 등 자기 발전을 위해 힘썼으며 다양한 분야의 사업도 펼쳐왔다. 차량을 적합하게 개조해 직접 운전을 하며 현재는 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로서 자신과 같이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조례 제·개정 및 장애인활동지원가를 지원하는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 김호상 대표님 및 부산장애인인권포럼 소개.
- 2007년 부산장애인인권포럼 창립하고 장애인 정책, 인권 상담, 장애인 정책 모니터링, 조례 제·개정 등의 일을 해오고 있다.

조례를 개정한 사항은, 조례 내용에 장애인 비화 내용이나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이것은 시대가 바뀌면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장애인)비하 발언들을 삭제, 대체 용어 사용, 수정 작업 등을 해왔다.

제정 분야는 장애인 관광 문화 향유권 관련 조례, 인권 조례 등의 제정에 직접 참여했었다. 또 시의원 구의원 모범 조례, 조례안 검토, 요청을 많이 받았다. 다른 지역이나 단체와 공유해 전국 모범 조례안을 토대로 부산 지역 실정에 맞는 조례안으로 수정 제안해왔다.


■ 장애인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 무엇이 필요한가.
- 선진국에 비교해서 전체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 정착이 안 됐다. 장애인 기본권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비장애인이 누리고 있는 권들이 장애인에게 미치지 못하는 문제다. 이동권이나 교육권, 노동권 등 일상을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이 돼 있지 않다.

우선은 장애인 소득보장이 중요하다. 장애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에서 제외돼 있다. 대체로 기초수급대상자로 가난한 상황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로 사회에 진출해 발생한 문제라고도 본다. 이 때문에 장애인은 소비자로서 대우를 못 받지 못하고 있다. 돈을 스스로 벌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들은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이 때문에 가난의 대명사가 장애인이 됐다.


■ 무척 하기 힘든 질문이다. 어떻게 장애를 입게 되셨는지, 또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하다.
- 장애를 입은 상태로 이 사회를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물었으면 좋겠다. 군 제대 후 25살 때 음주운전 차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3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했다. 이후 자신과 싸움을 15년 정도 했다. 다치기 전에는 건강에 스포츠맨으로서 검도 선수 생활을 하고 관련 대회에서 입상도 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유교 교육을 받은 정서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부모님께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잘 보존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전 매일 병원에 오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죄책감이 너무 많이 들었다. 무척 괴롭고 송구스러운 심정이었다.

30개월 병원 생활 후 별도로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했다. 정서적 안정을 고려해 부모님께서 권유하셨다. 이때부터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15년 정도 그러고 나니까, 생각이 바닥을 친다고들 하는데, 다시 삶에의 용기인지 오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에너지가 솟아오른다는 느낌이 들어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 관련 제도들이 잘못돼 있고 안 맞는 것들을 보게 되고 관련해 지역신문에 투고를 다수했다. 글을 올리면서 인권적 발상이 생긴 것 같다. 부산으로 다시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머물던 곳은 공기만 좋고 어두운 밤은 빨리 찾아왔다. 불이 빨리 꺼지지 않는 도시로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부산을 찾게 됐다. 그 후 인권단체를 알게 됐다. 당시에는 단체가 많지도 않았고 모델로 삼을 만한 단체도 없었다. 이 정도 단체면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싶어 그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 그동안에 겪었던 18년 정도의 고통을 견뎌낸 각오와 경험이면 뭔들 새로 놀랄 일이 있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더는 정신적으로 힘들 것 같지도 않았다. 수동휠체어밖에 없었는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자신감도 회복이 됐다.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는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자신에게나, 사회에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인권단체를 접하고 보니 이걸 해야 되겠구나 싶었다. 서울을 자주 다니면서 많이 듣고 배웠다. 본래 사업가 집안이라 공부하는 시기에는 사업이 안돼서 그때는 공부를 많이 못 했다. 용기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다 싶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이어 정치학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조례 관련된 일을 하고 정치인들이 대상이니까 자신감조차도 떨어질 것 같아서, 공부를 통해서 자신감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사회복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오히려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치학 공부를 하면서 관련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됐다.


■ 한국인 자살률이 OECD 평균 상위에 랭크돼 있다. 고난에 처했다고 느끼시는 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일반적인 자살률이 높은 것은 행복지수가 낮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삶의 질이 어디서 오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돈에서 오는 건 아니다. 예전엔 돈이 없었어도 자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스스로 그런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이 자신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쉽진 않겠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소소한 행복을 찾아 정원을 가꿔나가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서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어려운 것과 자살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 2017년 9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국토대장정에 자발적으로 동행하셨다. 계기 및 소회라면.
- 옛 형제복지원 터에서 열리는 기자회견 참석했다. 그전에는 형제복지원을 잘 몰랐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코스 정도는 같이 가자 생각하고 김해까지 가면서 복지원 있었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런 마음이 더 깊어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당시 사회 정서를 잘 알아서 힘들었겠다고 여겨졌다. 자신과 가정 모두 파탄 난 경우도 있었다. 밀양까지 가다 보니 등을 보이기가 돌아설 수가 없었다. 사실 여정이 나름 재미도 있었다. 기자 경찰들도 많이 오셔서 만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숙소가 해결 안 돼서 일행들이 숙박업소 찾아서 헤매기도 하고, 밤 11시에 일정이 끝났는데 또 다른 일정이 생기기도 하고, 가다가도 많은 요인이 있었다. 피해생존자 박순이 씨, 한종선 씨, 최승우 씨 건강상태도 염려될 상태였다. 또 인권포럼도 자리를 하루 이틀만 비워도 사무실이 난리가 나는데 거의 3주 동안을 비웠으니 오죽했겠는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얼마 전 형제복지원 피해신고센터 개소식에 참석하니 당시 일행들이 너무나 반갑게 맞아줘 행복을 느꼈다.


■ 대표님 및 인권포럼 향후 활동계획은.
- 계획을 거창하게 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저런 일은 할 기회가 주어지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일들이다. 부담되지 않으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은 장애인 단체를 했던 사람으로서 욕먹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그동안에 못 배우고 사회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장애인 단체 관련 활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고 싶다. 장애인 관련 용어나 가벼운 말실수 등을 모르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선의로 말해도 피해를 보는 경우는 사회 구성원 사이를 더 멀게 한다. 사회 구성원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활동들이 인권 활동이다. 한 마디 속에 의식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는 포용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은 하되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매장될 만큼 충격을 입히는 것은 조금씩은 피해가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러한 이유로 인권 교육이 상당히 중요한데 인권교육을 통해서 인권이 무엇이고 그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중요한 것들을 알아가면 좋겠다. 인권 관련 사항을 시민 스스로 알려고 해야 한다.


■ 그 외 전하고 싶은 말씀.
- 살아있는 것은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장애를 입고 누굴 위해서 일을 할 수 있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나.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는 신기하고 재밌다. 생각을 크게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김호상 대표 활동 사진 영상 바로 보기 >> https://tv.naver.com/v/5100331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