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이뉴스] 김암덕(金巖德 1848-1870)은 조선 후기 예능인으로 바우덕이는 그의 이름 바위 암巖과 베풀 덕德 한자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바위처럼 굳건하고 변치 않는 덕성)으로 보이며, 일각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호 '덕암(德巖 덕이 있는 바위, 굳건한 의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열다섯 살에 사상 최초 여성으로서, 남사당패(유랑극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이끌었다.
남사당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며 곡예, 춤, 노래 등을 공연했던 집단으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이뤄진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며,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여 명으로 구성된다.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 때라고 하며, 시작된 곳은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이라 전한다.
김암덕은 1848년 안성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다섯 살이던 1853년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남사당패에 맡겨졌다. 이후 줄타기, 살판( 몸을 날려 공중에서 회전한 후 바로 서는 고난도의 땅재주) 등의 남사당 놀이를 익힌다.
15세 되던 해 남사당패 꼭두쇠(남사당패 우두머리)가 연로해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할 때 바우덕이가 만장일치로 선출됐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으며,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불러 공연을 펼쳤는데, 그 때 소고와 선소리(소리꾼이 소고를 치면서 합창하는 민속 가요) 공연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았다. 이 옥관자를 안성남상당패 영기(令旗 행진의 앞잡이를 서는 사람이 드는 기)에 걸어주었다.
이후 안성남사당패는 전국구 공연단체로 거듭났으며, 바우덕이의 이름이 곧 '남사당패'를 대신하게 될 정도였고, 바우덕이는 언제나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는 1979년 9월 30일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21호로 지정됐다. 풍물(판굿), 버나(접시 돌리기), 살판, 어름(줄타기), 덧뵈기(-보-, 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일각에서는 당대 바우덕이가 남성들에게 매우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녀의 사후 나이 차가 많던 남편은 한 바위에 올라 매일을 울었다고 하며, 또 이를 통해 설화의 한 맥락을 이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이에 따라 바우덕이가 실존 인물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간혹 일기는 하나, 1909년 '황성신문'에 노래를 잘하는 비취라는 여인의 언급과 함께 "안성청룡 바우덕이"가 등장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하니 바우덕이가 실존하였음은 물론 조선 최고 명창이기까지 했다는 점이 증명된다고도 한다˚.
또, 바우덕이와 그와 연관된 문화콘텐츠의 창의적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설화적 인물의 실존성에 지나치게 의존할 필요는 없다는 경계도 있다˚˚.
바우덕이는 비록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회개혁을 하다 쫓기는 신세가 된 이들을 남사당패에 가입시켜 주고 전국 장터를 떠돌며 사회 부조리를 알리고 일깨우는 등의 사회개혁적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이룩한 예인적 업적 또한 가히 '천재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에 따라 그를 기리는 축제와 연구, 저서들이 줄을 잇는 등 짧은 생애를 살다 간 한 여인이 남긴 족적은 적지 않다 하겠다.
바우덕이는 1870년 23세의 나이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생전 주로 머물렀다는 안성 서운면 청룡사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2018.10.02.
˚˚이정진, "'바우덕이'의 콘텐츠의 스토링텔링연구-축제이벤트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인문콘텐츠학회, 2012.
-자료참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안성시, 한국문화원연합회, 우리역사넷 등
`202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