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기_어때] ㉞평택시_농성

 

[와이뉴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1981년 7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됐다. 


해발 24m 낮은 구릉 정상부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고 있는 평지성으로 평면 형태가 긴 사각형 모양이고, 성벽 중간 지점이 약간 돌출돼 있다. 성의 둘레는 337m이며 성벽 중심부 남북 길이는 116m, 동서 길이 81m, 내부 면적은 5,964㎡다.

 


축성 시기 관련해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삼국시대 축성설은 도적이 심해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과 신선 도승(道僧)이 거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해온다고. 통일신라시대 축성설은 당나라 말기 한림학사 임팔급*이 간신의 참모를 당해 이를 피하고자 팽성으로 망명해 농성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견해다. 고려시대 축성설은 고려시대에 토성이 많이 축조된 점, 인근 처인성과 농성의 축성법 및 입지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고. 조선시대 축성설은 임진왜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다. 

 


2003년 조사 결과 동문지와 외황 하층에서 고려시대 토기와 기와, 분청사기 등이 출토돼 농성의 고려시대 축성설이 힘을 얻고 있다.


평지에 만든 성이지만 평상시에는 이용하지 않고 유사시 주변의 사람들이 사용한 방어용 성이라고도 전한다. 용인의 처인성(處仁城)과 쌓은 방법이나 지세가 비슷하다.

 


성 내부는 북쪽이 2m가량 높고 동서 중앙 단면이 높아 전체적으로 볼록렌즈와 같은 지형이다. 성 토양은 붉은 황토 진흙으로 모래와 찰흙으로 구성돼 있어 밭으로 일구기 적합했다고 한다. 무너진 곳의 단면이 붉은색 고운 찰흙을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고.


1980년 7월 인근 군부대에서 장교 및 하사관 주택을 건축하고자 임야훼손허가 처리과정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 문화공보부에 의뢰 조사한 결과, 현재 남아있는 토성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해 문화재로서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1998년 수원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 지역에서 자기편과 토기편 다수를 수거할 수 있었으나 집중 분포되거나 규모가 큰 것은 없어 일상생활 가운데 파손된 것들이 섞여 버려진 것으로 파악한다고. 성 내부 평탄지나 성벽에서도 많은 도토기편들이 수거됐는데, 대부분 시기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것까지 다양하며 이는 농성이 오랫동안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여러 번에 걸쳐 보수돼 왔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전한다. 

 

 

 

*임팔급: 중국 복건성 동령 팽성 항아촌이 고향이라고 전한다. 조각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 아산만 상류에 도착했고 중국 고향 지명을 따 팽성으로 불렀다고. 평택 임씨(平澤林氏) 시조로 당나라 한림 학사(翰林學士) 동래 8학사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한 학자 중 한 명이며 신라에 귀화해 팽성에 정착했다고.

 

-자료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역사문화연구원, 경기도메모리 농성유적조사보고서(1998) 등
※ 촬영: 202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