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쟁은 비참한 거야”


△ 송기영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수원시지회장이 앞선 2월 6일 호매실동 보훈회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1969년에 월남에 파병돼 1970년에 돌아왔다. 1년 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다시금 배가 부산항에 닿았을 때 그제서야 '살았구나' 싶었다. 1996년 갑자기 심장병으로 쓰러졌고 2000년 수술을 했다. 고엽제 상이등급 5급이었다.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수원시지회 송기영 지회장

얼마나 지났을까 헬기가 왔다. 내가 숨어 있는 갈대밭을 향해 기총사격을 해댔다. 그 때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맞았었다. 나는 온몸이 퉁퉁 불어서 도저히 뛸 수 없는 상황이라 주춤거리는 순간 헬기가 즉시 이륙했다. <중략>
그 후 50년 동안 악몽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밤 12시가 넘어서 발작을 하곤 한다. 3년 전부터 겨우 진정되는 듯싶다. 지금은 고지혈증과 정신질환으로 헤매고 있다. 병원에 가도 정확한 병명이 밝혀지지 않는다. 나만이 아는 공포의 병인데 누가 알아주겠는가.
-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어느 특공대원 인터뷰 내용 가운데(고엽제 전우신문 발췌)


베트남 전쟁은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 및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으로 요약되며 1960~1975년까지 지속됐으며 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도 참전했다. 한국정부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전투 부대를 파병했다.

고엽제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뿌린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다. 고엽제를 맞은 많은 사람은 두통, 피부 질환, 암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고엽제에는 몸에 해로운 다이옥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94년에 베트남 정부는 약 200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에 의하면 참전 32만여 명 가운데 14만여 명이 고엽제 전우회에 등록돼 있다고 한다. 당시 8개 부대가 8년 8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렀다.

앞선 2월 6일 오후 수원시 호매실동 보훈회관에서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수원시지회 송기영 지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엽제전우회는 미군들이 뿌린 고엽제로 피해를 당한 환자 단체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2018년은 전우회 창설 21주년 차다.

송기영 지회장은 해병대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가게 됐다. 순서에 입각해 가게 됐으며 지원도 해야 했기도 했다. 23살 한창 젊은 나이 겁이 없을 때였다. 해병대는 18세 이상이면 지원이 가능했다. 1969년에 가 1년 후인 1970년도에 돌아왔다.

부산항 3부두에서 출발한 수송선은 베트남 다낭까지 5~6일에 걸려 도착했다. 배웅하던 가족들의 눈물은 갑판 위에서 잃은 방향 감각처럼 아스라이 멀어졌다.

현지에서는 고엽제를 알 수 없었다. 고엽제의 위험성을 인지한 것은 전역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고엽제는 비행기로 뿌려졌다. 고엽제가 뿌려진 지역은 산에도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예닐곱 개씩 차고 다니던 수통에 간장처럼 새카만 물을 정수제만 넣어 마셨다. 그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고엽제 후유증은 15개 후유의증은 20개의 병명을 기록한다. 후유증은 상의등급, 후유의증은 경도 중등도 고등도로 구분된다. 이는 보훈지청에서 역학조사 및 보훈병원 심의를 통해 병명에 따라서 급수를 부여하며 송 지회장은 상이 5급이다.

송기영 지회장은 1996년 심장병으로 쓰러졌었고 2000년 수술을 했다. 거의 죽을 뻔했다 간신히 살아났다.

월남에 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당시 우리나라는 보릿고개였었고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다고 여긴다. 송 지회장이 소속된 청룡부대는 현지에서 최전방 전투병으로 임했다.

당시는 전시로 양민과 정규군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전쟁터에서는 조준사격을 할 수 없다. 고정된 물체가 아니고는 조준사격은 사실상 불가하다. 국지 땅굴이나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민간인처럼 보였는데 지나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이 구축한 진지는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은 베트남 현지인에게 적합한 구조다. 양민학살 관련해 한국을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는 이야기를 송 지회장은 들었다.

송 지회장이 소속된 부대의 구호는 '단 한 명의 양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였다. 

현재 수원시에는 800여 명의 고엽제전우회에 등록된 피해자가 분포한다. 편찮은 분들이나 홀로 남은 부인 등이 주다. 약물과 병원 치료를 병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쟁은 비참한 거야. 입대 후 1년 만에 나라를 위해 갔다. 몇 개월 만에 간 친구들도 많다. 용병은 아니다. 나라를 위해 싸웠다.”
송기영 지회장은 결연히 말했다.

나라를 위해 나가 싸웠고 후회하지 않는다. 몸은 병들었을망정 누구를 위한 원망은 없다. 23살 젊은 청춘의 군인이었다. 송 지회장의 얼굴에 그간의 시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