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생의 무덤’ 소년시절 삼켜버린 지독한 늪

선감학원 아동피해 생존자 김성환 씨

어릴 적 부모에 의해 역에 버려져
아동 보호소 거쳐 선감학원행
도망이나 구타로 죽으면 멍석 말아 암매장
사장 반장 동성 성폭행 비일비재
육로 막히고 마산포 대부도 도주로 주민 신고로 재입소
아동보호소서 만난 형은 형제복지원행
탈출 후 삼청교육대 강제 입소
밖에 나와도 사람대접 못 받는 건 여전


일이 너무 고됐다. 열두 살 어린 소년이 해내기에는 처참하리만큼 고된 일들의 연속이었다. 우마차 바퀴에 발목을 집어넣었다. 골절로 한 달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구타가 무척 심했다. 곡괭이 자루로 많이 맞았다. 어떻게든 매를 맞아야만 하루가 마무리 됐다. 아이들의 생일은 개원기념일인 5월 29일이 됐다. 아동보호소와는 달리 외진 곳에 위치해 부모가 수소문해 찾아오기도 힘들었다. 그곳에서 5년을 보냈다. 선감학원 아동피해 생존자 김성환 씨를 앞선 9월 19일 오전 산본역 인근에서 만났다.


▲ 선감학원 아동피해 생존자 김성환 씨(62)가 앞선 9월 19일 오전 산본역 인근에서 선감학원 관련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선감학원이 인생을 짓이겨 놓았다”고 말했다.

선감학원(仙甘學園)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섬 선감도에 위치했던 소년 수용소다. 조선총독부가 선감학원 운영에 필요한 보조 인원 15가구 70여 명만을 남겨 놓고 선감도에 거주하던 주민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선감학원을 설치했다. 일제강점기 말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에 의해 세워져 1942년 4월에 200명의 소년을 처음 수용했다.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1946년 2월 1일 경기도로 관할 기관이 이관됐다.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초기인 1982년까지 40년 동안 운영해 1970년대 말까지 존속됐다. 지금의 경기창작센터 자리가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다.

김성환 씨의 부모님은 그가 어릴 적 그를 인천의 한 역에 버렸다. 그의 모친은 형과 함께, 부친은 그와 함께 지냈다. 계모가 생겼다. 새어머니는 아이를 낳았고 김성환 씨는 역에 버려졌다. 과자 한 봉지를 사주고 기다리라던 부친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작정 걸어 부친을 찾아 나섰다. 우연히 인근 역에서 부친과 계모를 만났다. 부친에 의해 영아원에서 다시 아동보호소로 맡겨졌다. 생활고 탓일 거라고 김성환 씨는 기억했다.

세 번째 시설에서 초교 입학을 했다. 아동보호소에서 우연히 만난 형과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선감학원으로 보내졌다. 1968년 7월 31일 열두 살이었다. 40~50명가량의 아이들과 함께였다. 그들을 데리고 간 직원의 이름을 아직 기억한다. 차 안에서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사강에서 8km 거리의 마산포였다. 김 씨보다 3~4살 더 돼 보이는 어떤 이는 버스에서 내려 도망갔다. 김 씨는 눈앞이 노랬다.

당시 선감도는 섬이었다. 육로는 막혀 있었고 마산포나 대부도로 도주해야 했다. 간신히 도망쳤다 해도 주민 신고로 재입소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혹은 물때를 잘못 맞춰 퉁퉁 부은 시신으로 바다 위에 떠올랐다. 시신은 멍석에 말아 암매장했다. 구타로 죽은 이들과 함께였다. 민간인의 머슴 선출도 있었다. 선감학원생 가운데 일 잘할 만한 아이를 골라 가는 것이었다. 일꾼을 골라 가는데 맨입에 됐을 리 만무하다고 김 씨는 말한다.

선감학원에는 300명 정도가 수용돼 있었다. 450명까지 있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8~20살 이상의 연령대가 분포했으나 규정은 8~18세 미만이었다. 종달새의 집, 자립사, 자활사로 불리는 총 3개사에 100명씩 머물고 그곳을 지휘하는 사람이 사장이었다. 한 개 사는 다섯 개의 반으로 구성돼 한 반은 20명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조회를 서고 기상 점검과 중간에 인원 파악도 했다. 사장과 반장은 갑 중의 갑이었다. 선생들하고의 관계는 저녁 밥 먹고 점검할 때까지였고 그 이후는 사장이나 반장이 통제했다. 동성 성폭행도 비일비재했다.

기상 시간이 되면 숙소 안에서 종을 쳤다. 벌떡 일어나 반별로 인원 점검을 받았다. 밤새 도주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김 씨는 전한다. 점검 시 용모가 단정하지 못하거나 자기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면 두드려 맞았다. 이어 주변 청소와 구보를 했다.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 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좁은 공간에 있는 큰 가마솥에 물을 넣고 장작으로 팔팔 끓였다. 그 물에 찬물을 섞어 씻었다. 논바닥의 얼음물을 깨고 그 물로 씻을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면 손발 청결 여부를 검사했다. 지저분할 경우 몽둥이로 뒤꿈치나 엉덩이를 맞았다. 엉덩이가 짓무르고 딱지가 졌다. 어떤 형태로든 저녁에 들어가면 매를 맞아야 했다. 그래야 하루가 지나간 것이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고 김 씨는 회상한다. 옷은 검은 학생복 한 벌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겨울을 났다. 제대로 된 양말도 없이 고무신으로 겨울을 보냈다.

입소 후 선감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됐다.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은 축산부 양잠부 이발부 등에서 일을 했다. 축산부는 소 닭 돼지 등을, 양장부는 누에를 키웠다. 이발부는 머리를 깎아줬다.

양잠부 작업은 원생 가운데 힘이 센 사람이 밖에서 관리하며 진행했다. 숫자 열을 셀 때까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주먹이 날아왔다. 지금은 뽕나무를 가지째 잘라 수확하지만 당시는 잎만 땄다. 겁에 질려 뽕밭에 숨어 있다 나가면 또 그대로 매를 맞았다.

여름에는 잡초를 베 퇴비를 만들었다. 체구가 큰 아이와 작은 아이 2인이 1조가 됐다. 50kg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지게도 없었다. 목표치를 채우려 풀을 물에 적시고 그 안에 돌을 집어넣기도 했다. 돌을 숨긴 게 들키면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뱀에 물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리면 팔이 퉁퉁 부었다.

실습지로 밭이 있었다. 30~40미터 정도의 할당량을 정해주고 잡초를 뽑게 했다. 호미도 없었다. 뿌리째 뽑아야 하는데 농기구가 없으니 맨손으로 풀 위만 뜯는 격이었다. 비만 오면 쑥 자라 있는 풀을 매번 뽑아야 했다.

40구공탄이라 불리던 큰 연탄이 들어올 때가 있다. 배가 선착장에 닿아도 바로 육지로 내릴 수가 없었다. 배와 육지를 발판으로 연결해 아이들이 전달해 옮겨야 했다. 아동 식당 자리까지 1~2km를 사람들이 손수 날랐다.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로 발판은 출렁거렸고 연탄을 안은 채 바다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관리자들은 사람보다 연탄을 걱정했다. 아이들에게 4kg에 달하는 연탄은 무거웠다. 가다 쉬고 가다 쉬며 옮겼다.

보리밥에 시커멓게 맛이 간 벤댕이젓을 반찬으로 줄 뿐이었다. 소금을 비벼서 소금밥을 먹기도 했다. 얼굴이 부었다. 그마저도 배불리 먹지 못해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배고픔에 개불이나 메뚜기, 뱀 등을 잡아먹었다. 먹을 만해 보이는 풀이 보이면 뜯어 먹었다. 콜레라가 유행할 때가 있었다. 발병한 이는 배를 타고 나가 치료를 받았다. 의무실도 있는데 선생들은 아이들이 원하는 약을 주지 않았다.

김성환 씨는 선감학원에 5년 있었다. 탈출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선감도에서 마산포로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다. 물이 빠진 갯벌 2km를 통과해야 했다. 물이 미처 빠지지 않은 물고랑이 있었다. 물때를 잘못 맞추면 빠른 밀물 속도에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었다. 눈과 몸이 부은 채로 떠올라 발견되기도 했다. 물 빠질 시간이 되면 선생들이 섬의 산 위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감시했다.

초등학생 김 씨는 안개 낀 날을 택했다. 우회 도로를 선택해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을 건넜다. 11명이 도주했다. 털섬을 거쳐 대부도로 들어갔다. 발바닥은 다 갈라졌다. 3월초 진달래가 몽우리 질 무렵이라 쌀쌀했다. 아이들과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맞닿은 대부도 인가에 밥을 얻어먹으러 들어갔다가 그 집의 신고로 대부도 지서에 인계 됐고 선감학원으로 다시 끌려갔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미 잡혀 있었다. 하루만의 탈출은 이렇게 끝났다. 탈출 감행의 대가는 엄혹했다. 굴껍데기가 잔뜩 깔린 바닥에 원상폭격을 해 두피가 찢어졌다. 한 명씩 연이어 때리는 이른바 줄빳다를 맞았다. 세게 때리지 않으면 더 세게 맞았다. 기계식으로 서로 때렸다. 마주 서서 서로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비참한 형벌이었다.

일을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일을 시키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인권유린이라고 김 씨는 말했다. 지금 김 씨는 땅을 쳐다보는 것도 싫을 만큼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렸었다. 당시 보여주기식 입학이 있었다. 학년마다 공부 잘하는 아이 2명씩 중학교에 보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아이는 전체의 5% 정도에 불과했다. 김 씨는 중학교에 다녔고 졸업식 때 우등상도 탔다. 선감학원에서 나루터까지 2km였다. 매일 10km 이상을 걸었다. 중학교에서도 선감학원생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학교를 못 다니는 원생들은 계속 일만 했으나 달걀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수익금은 원장 등이 모두 챙겼다. 임금은 전혀 없었다.

2차 탈출을 감행했다. 1973년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8월 10일 방학 소집일에 도망을 갔다. 원생 셋이 다녀야 했던 시스템으로 혼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몰래 배를 탔다. 5년하고 열흘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인천 연안 부두에 도착했다.

2차 탈출 후 부랑아 보호소인 인천 선인원에 잡혀 들어갔다. 그곳도 방에 철망을 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정부보조금을 받으려면 김 씨와 같은 원생들이 필요했다. 선인원에서 차출된 원생들은 다시 선감학원으로 넘겨졌다.

그 이후에 선감도에 또 끌려갔다. 학원에서 채용한 거지 우두머리가 탈출생이 머물 만한 곳을 알려줬고 탐색해 찾았다. 탈출하면 빈집이나 공터 등에서 자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잡힌 원생들은 인천 시청에 인계되고 다시 선감도로 넘겨졌다. 그 때는 이미 김 씨가 성장한 후였으므로 몇 달만 머물렀다.

네 명이서 마산포로 도망쳤다. 세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마산포 앞 어도에서 굴 양식을 주로 했다. 선감학원생들이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안 주민은 선감학원 신고와 양식장 머슴 가운데 선택하라고 탈출생들에게 말했다. 한 명만 섬에 남고 나머지는 수원으로 해서 나왔다. 마산포에서 차를 타면 사강 남양 비봉으로 이어졌다.

탈출 후 1년 동안 걸인 생활을 했다. 12살 때 들어가 17살이 돼서야 나왔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교복은 입었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형을 찾아보려 무작정 서울로 갔다. 어렸을 적 경험했던 일을 했다. 밥을 얻어먹고 따뜻한 스팀이 나오는 열차 의자 밑에 숨어 목포 등지로 돌아다녔다.

배운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천에 오니 선감학원에서 알던 이들은 대부분 구두닦이 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공원에서 자면 눈이 쌓였다. 십수 명이 모여서 잠을 청했다. 가마니를 깔고 잤다. 상가(喪家)에서 내다버린 고인의 이불을 가져다 덮었다. 버린 사과 궤짝을 장작으로 불을 때 몸을 녹였다. 또래 여학생들이 가방 메고 가는 것을 보면 창피하고 부러웠다. 구두통을 메고 돌아다녔다. 한 켤레 닦아 받은 20~30원으로 자장면을 먹었다. 영화와 쇼를 번갈아 하는 삼류극장 관리인의 구두를 닦아 주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디고 시간을 보냈다. 선감학원 밖에서도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경찰은 걸인 생활을 하는 김 씨를 잡아 가뒀다.

1979년도에 인천에 방을 얻고 있었는데 지인을 통해 어렸을 때 헤어졌던 형을 찾았다. 형은 주민등록증이 없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1980년도에는 한 달간 삼청 교육대도 다녀왔다. 형을 만난 지 얼마 안 돼서다. 형사가 찾아왔다. 경찰서 동행을 요구했고 이미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드니 밥 먹여 줄게 들어가라는 형사의 말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A~D로 등급을 매기는데 D는 경찰서 훈방 C는 전방 교육 4주 B는 삼청교육대 교육 4주 A는 6개월 근로훈련이었다. 내보내준다는 말에 지장을 찍었다.

부모님이 생전에 계시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마루가 연결된 일본식 건물 특유의 서울 연희동 집에서 형과 목마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버지 성함은 김형걸 씨로 팔순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 함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서운함과 원망도 많았지만 제 자식을 떼어놓은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선감학원생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요일마다 모여 축구를 하기도 했다. 김성환 씨는 “자기네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 우리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8~9살 먹은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일어났는지. 선감도와 삼청교육대가 인생을 완전히 짓이겨 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깊은 회한에 잠긴 모습이었다. 내내 비장하고 굳은 표정이었던 그가 희미하게 한 번 웃은 것은 인터뷰를 마치고 마지막 악수를 할 때였다. 그는 12년째 복지원에서 어르신들 배식 봉사를 하고 있다. 음식을 나르고 치우고 쓸고 닦으며 그의 마음도 치유하려 노력하고 있다. 도망가다 잡히면 한동안 걷지 못할 만큼 맞았다. 맞아 죽은 아이들은 묘비도 없이 암매장 했다. 그래도 자유를 향한 갈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선감학원을 나와 맞은 것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황량한 세상이었다.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