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글픈 그 이름 ‘카레이스키’

남북 통일을 넘어 유라시아 번영 길 여는 선두 주자
김종천 고려인강제이주국민위원회 사무국장


생존을 위한 유랑(流浪) 처절한 삶
1860년대 조선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민초들은 좀 더 나은 생존 환경을 찾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다. 그들은 그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간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 민족 억압 정책으로 이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다. 그들은 다시 치열한 생존력으로 척박한 땅을 옥토로 변화시킨다.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고 그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에게 소연방 해체는 ‘폭탄’이었다. 갑자기 삶의 환경이 바뀌고 언어 또한 달라졌다. 표준어로 사용하던 언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고 각 나라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했다. 해체 당시 살고 있는 국가의 국적을 취득해 가족의 국적이 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삶은 다시 힘들어졌다. 한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국적 취득은커녕 영주권 취득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언어는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이들은 ‘외국인’이고 이방인일 뿐이다. 대다수 한국 거주 고려인은 일일 근로자로 분포하며 자녀 교육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고려인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 신분증 국적에 카레이스키(고려인)이라고 스스로 별도 표기할 정도로 그들은 고려인을 자랑스러워한다.

5일 안산시 사동 고려인 야학당에서 김종천 고려인강제이주국민위원회 사무국장에게 고려인 관련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김종천 고려인강제이주국민위원회 사무국장이 5일 안산시 사동 고려인 야학당에서 고려인 관련 사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서글픈 그 이름 ‘카레이스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말 학정에 시달린 민중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비교적 국경과 가까웠던 함경도 부근 민중들이 국경선을 넘었다. 당시에는 이주의 자유가 없어 백성들은 정해진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러시아의 넓은 황무지를 향해 떠났다. 황무지를 황금벌판으로 만들었다. 조선인 학교를 세우고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지주의 자녀들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조선말을 사용하고 군사 학교를 보냈다. 물론 일부는 생존을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독립 운동의 전지 기지 역할을 하게 됐다.

국내 체류 고려인은 4만5천명 정도다. 그 중 안산 체류자 1만2천명 전 세계에 고려인 명칭을 지닌 이들은 45만명 가량이다. 고려인은 우리말로 하면 한인 혹은 코리아인이다. 소련말로 카레이스키다. 소연방(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시절 중앙아시아 있던 고려인들을 카레이스키라 불렀던 것이 명칭의 유래다. 한국인들은 고려인들을 잊었었다. 1937년 러시아 연해주 땅에 20만 명이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1937년 2차 세계대전 전 국제이해 관계와 스탈린의 소수 민족 억압 정책 등으로 20만명 이상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에 유폐시켰다. 1937년 9월 9일 발생한 일이다.

1차 세계대전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전 세계에 감돌고 있을 때 스탈린은 전쟁 준비 중이었다. 서부 전선의 군수공장을 모두 이동시켰다. 동부전선인 일본 또한 세계 열강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던 곳이다. 계속 잔전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잔전쟁 중 하나가 일본과 패망한 조선 독립군과의 전쟁이었다. 동부전선을 안정화 시켜야 하는 스탈린은 고민이었다.동부 전선의 민족 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에게 폭압 정책을 펴게 됐다. 강제 이주하기 전 스탈린이 가장 먼저 처단한 이들은 공산당 당원과 독립군이었다. 민족지도자들이 저항을 못하도록 사살시킨 것이다.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1만6천500명 정도가 숨졌다. 최대는 6만명 가량이 사망했다는 수치의 기록도 있다. 17만 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 사건은 40년 뒤에 러시아 작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그때부터 한인을 고려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주 과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황금기를 일으켰다.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을 옥토로 변화시킨 것이다. 경제·문화적 부흥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러한 비극을 듣고 일어섰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그 전까지 그들은 목숨을 걸고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후 일본어에서 조선어가 다시 공용어가 됐듯 소연방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려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국가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집단 농장은 사유화 됐고 그 과정에서 고려인은 또다시 이방인이 됐다. 소비에트 시절 소비에트 사람이 되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했으나 소련 해체로 다시 갈 곳 없는 뿌리 없는 사람들이 돼버린 것이다. 그들의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그들을 몰랐다.

고려인에게 영주권 취득은 ‘하늘의 별따기’
안산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1만 2천명 정도로 대부분 임시 체류자다. 연령대는 0~70세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집단 이주를 계속하고 있다. 소연방 해체 이후 살 곳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안산시 거주 중국인 8천400명 국적 취득 전 단계인 영주권 취득자 1천590명. 중국 동포(조선족) 4만4천900명 거주 영주권 취득자 5천387명. 타이완인 74명 거주 영주권 취득 21명. 러시아 국적 고려인 4천48명 거주 영주권 취득자 59명. 중앙아시아 고려인 8천359명 거주 영주권 취득자 24명.

2017년 1월 기준 안산시 거주 외국 국적자의 영주권 취득 현황이다. 그나마 이렇게 영주권을 취득한 이들은 결혼 이민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김종천 고려인강제이주국민위원회 사무국장은 추측한다. 그만큼 고려인에게 귀화나 영주권 취득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실상 그들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영주권인데도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지원금이 아닌 그냥 평범하게 한국에서 일하며 스스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대체로 한국 거주 고려인은 임시 체류로 3년 가량 머물 수 있으며 이는 비자에 따라 다르고 지속적 갱신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정규직 근로자로 취업할 수도 없다. 안산 인력 시장에 가장 많은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고려인 근로자다.

영주권을 취득하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고 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주권 취득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고려인에게 면담 심사만으로 영주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재산 유무를 심사하고 시험을 치러야 한다. 모든 기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재산이 있을 리 없고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이 시험을 잘 볼 리 만무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일용직 근로자가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어떻겠느냐고 김 국장은 반문한다.

영주권을 받으면 원하는 경우 한국으로 귀화할 수도 있다. 간혹 귀화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국이 그들에게 무엇을 했는가”라는 물음 이외에도 국적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라고 김 국장은 설명한다. 그들에게 나고 자란 땅이 그곳이며 조국은 분단된 상태다. 그럼에도 그들은 취업과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왔다.

고려인 아이들의 취약한 보육 수준  
한 고려인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무슬림으로 만들 수 없어 한국에 왔다. 인터뷰를 진행한 사동 야학당 외에도 선부동에도 야학당이 있다. 선부동에는 7천~8천명 정도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사동에는 4천~5천 명 정도의 고려인이 밀집해 거주하기에 야학을 창설했다.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고려인이기에 아이들도 다수다. 이들 가운데 미취학 아동들은 한국의 보육원에 들어가기 힘든 실정이다. 외국인이기에 원비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기도 하고 그들의 부모들은 하루 12시간 일을 해야 하기에 보육 기관 운영 시간과 맞지 않아 그렇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려인 가운데 1~2명이 집단 보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일부 아이들은 사동 야학당에서 방과후 학습을 한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의 일인데 아이들에게도 고려인의 처지는 잔혹하다고 김 국장은 개탄한다.

남북통일 넘어 유라시아 번영 여는 선두 주자 고려인
김종천 국장은 고려인들을 불쌍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연민만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고려인들은 가는 곳마다 번영으로 이끈 사람들로 연해주를 발전시키고 조선 독립 운동을 선도한 사람들이다. 연해주 독립운동 전진 기지는 대한민국 독립을 이루는 데 이바지한 장소다.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등의 혁명가들이 연해주에서 탄생했다. 조선의 해방 운동과 번영을 이끌었고 또다시 버려지지만 번영을 이끌었다.

남북통일이라는 과제를 넘어서 대한민국이 더욱 번영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까. 김 국장은 고려인이라는 광대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창했다. 더불어 고려인의 지위를 동포로 명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한민국은 섬나라가 돼 반도 기질이 사라졌다. 경의선 철도 연결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경의선이 연결 되면 고려인들이 살았던 중앙아시아를 기차 타고 가게 된다. 고려인들과 살아가는 것은 통일을 안고 유라시아 공동 번영의 길로 가는 길이다. 이들은 지금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려인만큼 중앙아시아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광활한 대국을 고려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45만의 이들은 광대한 인적 자원이다. 그들의 일시적인 어려움을 조속히 극복하게 해줘야 한다. 고려인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시각이 강하다. 고려인의 법률적 지위 자체가 외국인 노동자다. 고려인을 다문화라고 하고 있다. 우리의 동포로 인식하고 법률적 지위가 명확히 동포로 가야 한다. 다문화나 외국인으로 분류돼서도 안 된다.
 
2017년 고려인 특별법이 국회에서 개정될 것으로 김 국장은 전망한다. 오는 9월 17일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고려인 대회도 예정돼 있다. 대회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계속하자는 잠재적 계획도 갖고 있다. 경기도민이 참여하고 만들어 가는 대회가 되기를 김 국장은 희망한다. 고려인 강제 이주 80년을 기념해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자리다. 1991년 이후 어려움에 닥친 고려인을 동포로서 위로하고 우리와 함께 코리안으로 살아가자는 희망을 주는 대회이기도 하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으니 많은 참석 바란다고 김종천 국장은 전했다.

반도를 넘어 유라시아 공동 번영의 길 서막을 여는 그 첫 걸음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