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거기는 위안소가 아니라 사형장여”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이옥선 할머니

15살 차에서 내린 낯선 남성에게 강제로 끌려가
매서운 감시와 폭력 속에 중국 비행장 활주로 노동생활
연변 연길 시내 위안소 탈출 시도에 일본 헌병 “다리를 자르라”
“박근혜 전 대통령 돈 받고 우리 할머니들 팔아먹었다”
“이 문제 꼭 해명해야 돼. 후대가 있고 역사가 뚜렷이 나와 있으니”


“거기는 위안소가 아니라 사형장이여. 그 놈들이 그 많은 한국 딸들 데려다 죽였지 무슨… 이렇게 해놓고 안 그랬대.”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옥선 할머니는 말했다. 91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총기와 기억력을 지닌 할머니는 강제로 끌려가던 그 날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모두 잊지 않고 새기고 있었다. 정제된 표현과 언어로 할머니는 수년 간의 위안부 생활을 풀어냈다.

13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이옥선 할머니에게 일본군 위안부의 생생한 증언과 심경을 들어봤다.


▲ 13일 이옥선 할머니가 위안부 관련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26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향인 부산 봉선동에서 타 도시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가지 못했고 “7살부터 15살까지 울었다”. 이옥선 할머니는 울산의 한 가정으로 남의집살이를 가게 됐다. 거기서 일을 못한다고 많은 구박을 받았다. 지금이야 수돗물에 전기밥솥이 있지만 그 때는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을 먼 데서 동여와 밥을 해야 했다. 15살 어린 소녀가 하기에는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집주인이 심부름을 보내 다녀오는 길에 신작로에서 무언가가 앞을 막았다. 차에서 내린 남자 둘이 길을 막고 “너 이름이 뭐야”하며 다짜고짜 양쪽에서 한 명씩 그녀의 팔을 잡고 갔다. 끌려간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으로 간 그녀는 비행장 활주로 닦는 일을 했다. 일본인들은 3중으로 된 철조망으로 정비하고 그 주위를 전깃줄로 에워쌌다. 감시하는 보초까지 세웠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일을 더디게 하면 쫓아와 “빨리 손을 놀리라”며 단번에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맞고 피를 흘려 몰골은 형편없이 됐다. 물 한 방울도 못 얻어먹을 만큼 고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끼니로는 작은 찐빵 하나가 전부였다. 고된 강제 노동에 턱없이 적은 식사였다. 몇 천 몇 백명이 모여 일할 수 없다고 항의하기도 하고 숙소에서 소수가 모여 도망가자고 모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엄마 아버지도 못 보고 죽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어린 나이에 멀리 타국으로 끌려간 어린 소녀들이 도망칠 길이라고는 나오지 않았다. 3일 동안 계속 되는 ‘춥고 배고파 일못하겠다’는 소녀들의 항의에 일본 군인 둘이 오더니 “일을 안 하니 보내줄게”라고 말했다. 소녀들은 드디어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기쁨에 겨워 “벙벙 뛰며 나왔다”.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연변 연길 시내 위안소는 초가로 돼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에는 어두컴컴한 복도가 죽 이어져 있었다. 들어가자 소녀들을 앉히고 보따리를 하나씩 줬다. 소녀들이 입어야 할 일본식 기모노 의상이었다. “너네가 (이 옷 살)돈이 없어 우리 돈을 주고 샀다. 돈을 많이 벌어야 고향 간다”고 위안소 사람은 말했다. 강제로 끌려와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했으나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다. 목욕하고 입으라고 준 옷은 소매가 길어 입기 불편했다.


그녀가 있었던 위안소는 연변 연길 시내에 위치했으며 7~8명 정도의 조선 여자들이 있었다. 일본 여자도 있었다. 그녀는 조선인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군인을 접대하지 않아도 됐었고 일본인과 같은 고깃국에 밥을 먹었다. 조선 여자는 접대하지 않으면 폭행을 당했다.

일본인들이 고기 반찬에 밥을 먹을 때 소녀들은 “개죽처럼 배추 우거지 잘라 넣은 것에 김치뿐”인 밥을 먹었다. 돼지풀을 먹고 살았다. 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 시절 돼지풀이라 불리던 그것도 맛있게 느껴졌다. 해방 후 농촌에서 생활하며 그것이 돼지풀인 줄을 알았다. 나눔의 집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이옥선 할머니는 “우리가 이거를 먹고 살았다”며 풀을 뜯어 보이며 항의한다. 한국에서 아무리 곤란해도 좁쌀밥은 구경 못했으나 거기 가서 좁쌀밥에 수수를 섞은 밥을 먹었다. 식사는 늘 부실했다. 좋든 나쁘든 배부르게 주면 좋은데 배부르게 먹지도 못했다.

폭력은 뗄 수 없는 일이었다. 맞아서 눈멀고 귀멀고 이도 빠졌다. 칼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순순히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이놈의 가시나 건방지다. 죽어봐라”며 그녀를 마구 두들겨 팼다. 너무 맞아 쓰러진 그녀 가슴 위로 칼을 내리 찔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오른팔을 내밀어 막았다. 위안소 관리는 눈감았다. “그래서 살았지. 여기 맞아서 살았다”고 그녀는 소회했다. 그 때 칼에 맞은 흉터가 아직까지 남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탈출을 감행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중국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망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내 또 잡힌 그녀는 일본 헌병에게 넘겨졌다. 당시 헌병은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헌병에 가서도 또 맞았다. 한 번 칼을 맞았으면 됐지 칼을 두 번 맞을 순 없었다. 죽을 상황에 놓이니 악이 생겼다. 헌병은 자꾸 도망가는 이유를 물었고 그녀는 “큰 게 없다. 춥고 배고프고 일한다고 끌려와서 왜 이렇게 하냐.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헌병은 “이 놈의 가시나 다리를 잘라 버려야 도망가지 않는다”며 칼로 그녀의 발을 내리쳤다. 흉터는 고스란히 그녀의 발에 남았다. 이옥선 할머니는 팔과 다리의 흉터를 직접 내어 보였다. “우리 말하는 게 아니고 일본사람의 말이 거짓이다. (우리는)틀리는 게 없다”는 말과 함께.
일본 측은 위안부 색출 시 직업 제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옥선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로 “돈 한 푼 못 받았다. 그러면 왜 싸움을 하겠어”라고 증언했다. 한국의 딸을 11살부터 끌어갔다고.

“11살이 뭐여, 11살이… 우리 한국의 남녀 없이 끌어갔다. 종자를 말리려 했지. 남자는 군인, 여자는 위안부. 무슨 값이 있는가. 값이 없다. 고저 특공부대 위문품 하나 던져주는 그 식이다.”

해방이 된 후에서야 위안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소녀들은 해방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위안소 사람들은 소녀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일본 여자들이 소곤거리는 것을 들었다. 어떤 군인이 “너네 여기 있으면 죽는다. 너네 해방됐다 바보들아. 시장이 불바다다”고 말했다. 나와서 본 시장은 정말 “불바다”였다고 이옥선 할머니는 회상했다. 위안소에서 나와서는 밥을 빌어먹는 거지생활을 했다. 그렇게밖에 다른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못 배우고 헐벗어 춥고 배고프기만 한 곳 그녀에게 조국은 그런 곳이었다. 한국에 오지 않으려고 국적을 중국으로 바꿨다. 중국 국적인 채로 부모 형제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눔의 집에서 두 번째 손길을 내밀었을 때 이제 아무도 없다고 느낀 그녀는 그제야 조국의 품에 안착했다. 2006년 65년만의 귀향이었다. 이옥선 할머니가 쓰는 지금의 연변 말은 그 때문이다. 들리기는 하나 분석은 좀 어렵다고 한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해 이옥선 할머니는 “그 합의가 바로 됐어, 바로 안 됐지. 우리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왜 이렇게 하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옛날에 아버지 하던 식으로 똑같이(했다). (오랜 중국 생활로)박정희가 누군지 박근혜가 누군지 모른다. 나이 어려서 떠났기 때문에 모른다. 나 혼자 부동의 하면 무슨 소용 있어. 여자 대통령이니 우리를 좀 봐주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일본에서 그 돈을 받았으니까 우리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합의를 할 때 돈을 조금 가져와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그렇게 안 됐지. 할머니들 죽기를 기다리는가”라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그 돈을 한 사람에게 모두 줘도 안 받을 거라고 이옥선 할머니는 말했다. 이제 할머니들은 거의 90세가 넘고 힘이 없다. “생활관에서 저리 누워서 오줌 똥 받아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손님 접대할 형편이 안 돼. 이 문제를 꼭 해명해야 돼. 후대가 있고 역사가 뚜렷이 나와 있으니.” 그녀는 말했다.

한을 많이 품고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달리 그 사형장에서 죽지 않고 빠져 나와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이옥선 할머니는 말한다. 일본에게 배상하라고 사죄하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먼저 간 사람들은 한을 품고 갔다는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질문에 이옥선 할머니는 곤궁하게 살았던 시절을 한탄했다. 그 때에도 잘사는 사람은 분명 있었다고. 그녀는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중국 가면 배고프지 않고 돈 많이 번다고 선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래 살면 얼마나 살아야 하느냐며 자신이 나이를 적게 먹은 게 아니라고 이옥선 할머니는 말했다. “지금 생각하는 건 지금은 죽는 게 옳은 일이다. 그 놈이 좋아해도” 할머니는 말했다.

위안부 할머니들 관련 활동을 하는 일본과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할머니는 “우리가 일본에게 당해서 일본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일본 정부가 나쁘다”고 전했다. 일본 오사카에 위안부 할머니 역사로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도 했다.

오랜 세월 그녀의 가슴에 켜켜이 맺힌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일은 그녀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위안부 관련 사항이)조금이라도 발전을 했으면 좋겠는데 성과가 없어서… 암만 만나봐야 쓸데없는 것이다. 일본한테 할 말이야 많다, 똑바로 해야지.”
마지막 할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깊게 꽂혔다.


▶ 인터뷰 영상 및 이옥선 할머니 육성 :

https://youtu.be/_rpoYG9ivYw

https://youtu.be/Bnx8FvkWOgM

/ 공동취재 이정희 고문위원·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