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미얀마에 평화를

  - 편집국장 이영주

 

[와이뉴스] 앞선 2월 1일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딸인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집권 국민민주연맹이 압승한 2020년 11월 총선 결과에 군부가 불복하며 일어난 쿠데타로 미얀마 시민의 사망자 수가 연일 늘어가고 있다. 27일 ‘미얀마군의 날’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는 시위대에 군경이 무차별 총격을 해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숨지면서 누적 사망자 수가 4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고 28일 보도됐다.

 

실상 미얀마 군부는 이번 쿠데타 이전부터 이미 정부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고 그 결과 1988년 쿠데타에 이어 2021년 쿠데타에서도 성공하며 불안정했던 미얀마의 민주주의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졌다는 평가다.

 

미얀마 헌법상 미얀마군 통수권자는 미얀마군이 스스로 임명한 총사령관이고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고 전한다. 특히 미얀마에 자유선거를 재도입하는 과정에서 있을 개헌을 막기 위해 의석 25%를 군부가 임명하며 헌법 40조에 비상사태 시 군 총사령관에게 권력을 인계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고.

 

미얀마의 군사독재 기간은 1962년 네 윈 미얀마군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세운 이후 2015년 총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하기 전까지 무려 53년간이었으며 1988년도에 군부의 독재에 대항했지만 군부는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고 이 8888항쟁의 결과로 네 윈이 실각하고 사회주의가 철폐되면서 잠시 민주화의 바람이 불며 1990년에 자유총선이 치러지기는 했지만 신생 군부세력들이 패하는 결과가 나오자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다시 독재정치를 펼쳤고, 2007년에도 승려들을 필두로 또다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이마저도 유혈진압으로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미얀마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미얀마의 국가고문 아웅산 수치와 미얀마의 대통령 윈 민 및 여당 지도자들이 축출된 뒤 가택 연금됐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몇 시간 뒤 미얀마군은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월 3일 미얀마 경찰은 아웅산 수치를 수출입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월 2일 미얀마 전역의 공무원과 의료계 종사자들이 쿠데타에 반대하며 전국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쳤고 앞선 1일에는 태국 방콕의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200여 명의 미얀마인과 일부 태국 민주주의 진영 운동가들이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미얀마 사태로 UN은 물론 각국에서 관련 성명들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이는 행동 없는 말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4.19와 5.18 등의 유혈 민주화 사태를 겪어 민주화를 쟁취했듯이 이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칫 강대국의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와 함께.

 

이번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기인한 폭력성은 과연 어디까지 발현될 수 있는지 통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자국의 군경이 자국 시민에게 발포를 명하고 이로써 죽고 다치는 시민들이 날마다 늘어나는데도 정작 국제사회는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주는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즈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린 글귀인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수가 될까. 총칼로 무장한 군부 앞에서 자신들의 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미얀마 시민들의 죽음이 그저 먼 나라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시점의 우리 국민이 겪어야 했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미얀마에 평화를, 미얀마의 평화를 무력으로 압제하는 군부에는 동량의 무력(武力)으로 대응하는 것을 검토해보는 것이, 연일 스러져가는 미얀마 시민을 고려할 때 정말 자중해야만 하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