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주 시민들 지키고자 하니 겁나지 않았다”

박남선 5.18광주민중항쟁 시민군 상황실장/ 현 5.18항쟁 구속자 동지회 상임대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
1980년 5월 23일 오후 3시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전라남도 도청에서 개최됐다.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 대표의 성명서 발표가 있었고 시민 호응이 가장 좋았을 때는 위의 말을 할 때였다. 함성과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김태종 증언>

▲ 박남선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대장)이 앞선 1일 오후 옛 전남도청 시민상황실 앞 벤치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대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항쟁 구속자 동지회장 상임대표를 2018년 4월 1일 오후 옛 전남도청 시민상황실에서 만났다. 30년 전 5월 광주는 3개 여단의 공격과 20사단의 포위를 당했다.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당시 전남도청에는 700여 명의 시민들이 있었다. 박남선 상임대표는 광주 시민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황실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최대한 전하려 애썼고 항쟁 후 투옥 돼 사형선고를 받고 석방이 되기까지 3년여 과정을 비장하면서도 차분하게 풀어냈다. 4명이 들어서면 비좁은 감방에서 3명이 앉고 1명은 서있는 이야기부터 사형수로 노예처럼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생활하던 이야기, 손톱 밑을 찌르고 둔기로 겁박하며 북한 간첩임을 밝히라고 종용당한 이야기까지 진솔하게 전했다.

인터뷰 후 ‘민주의 길’이 들어서는 전남대학교와 국립 5.18민주묘지 등을 직접 안내하며 그 길들에 서린 역사 이야기도 전했다, 먼저 간 동지들에게 살아남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 박남선 5.18항쟁 구속자 동지회 상임대표가 옛 전남도청 시민상황실을 가리키고 있다.

 

■ 당시 상황을 전한다면. 어떻게 시위에 참가하게 됐으며 그 후 상황은 어땠는가.
-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구 세력이 박정희 서거 후 12.12군사 쿠데타를 한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 이후에 전국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민주화된 정부가 수립이 된다면 자신들의 반란 행위가 처벌을 받을까봐 광주에서 학살극을 자행하게 된다. 박정희 사망 이후 전국이 계엄 상태였다. 제주도는 제외됐었는데 5월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로 공수부대를 파견했다.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유독 광주를 지목한 이유는 박정희 정권 하 부마사태 당시에 민주화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 진압해서 선동했다. 광주에 병력을 파견해 민주화 요구 시위를 강제 진압하게 되면 광주가 시끄러워질 것이고 그러면 계엄령 해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획 하에 3공수 여단을 광주에 파견해 광주시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총검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구타했다.

그 가운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시민들을 폭행 학살 자행하니 그걸 본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잔인한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그들은 적당한 선에서 그 행위를 무마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광주시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공수부대가 결국 광주를 포기하고 퇴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이후 청장년을 중심으로 한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 만행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파출소에 비치된 총기들을 가지고 와 강력 대응을 시작했다.

▲ 박남선 5.18항쟁 구속자 동지회 상임대표가 옛 전남도청 건너편 전일빌딩을 가리키고 있다. 전일빌딩은 계엄군의 헬기사격이 가해진 곳이다.  

 

■ 당시 상황실장으로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전남도청 중심으로 한 분위기는 어떠했나.
- 바로 아래 동생이 계엄군에 무차별 폭력에 중상을 당했다. 코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함몰되고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다. 전남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어머니께 받았다. 부친 본인 남동생이 5.18민주유공자이고 모친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다. 당시 27세였고 중흥 1동 예비군 공대에 부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계엄군 만행에 시위와 무장을 시작하고 대응하다 보니 시민학생 수습위원회에서 무장 시민을 총 지휘할 상황실장 직책을 맡겨 주셔서 시민군 대장을 하게 됐다.

전남도청이 계엄군의 근거지였다.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본부였는데 광주 시민 저항이 격렬해지자 공수부대가 퇴각하고 22일 아침 전남도청을 점령하게 된다. 그 때부터 27일 아침까지 이곳에서 6일 정도 있었다.

친동생 부상뿐만 아니라 계엄군이 물러가기 전 18일부터 21일 사이에 교복을 입은 학생에게 대검을 꺼내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주위 시민들이 항의하자 항의에 맞춰 여학생을 찌르고 무차별 타격하며 체포해갔다. 임산부가 퇴각하는 계엄군에 죽은 일도 있었다. 잔인했다.

맞은편 전일빌딩에 헬기사격이 가해졌다. 1989년도 국회 청문회에서 그 사실을 증언했음에도 그 부분 관련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가 저 빌딩을 리모델링하려고 보니 탄알이 나오고 기총 사격한 흔적이 나와 문제가 되고 있다. 계엄군에게 집중 사격된 장소다.

전남대 학생들이 계엄군에 대항한 건 사실이다. 18일 0시를 기해서 계엄령이 확대되니 사전 검거를 계엄당국이 시행한다. 대부분 전남대 학생들은 사전 검거돼 상무대로 끌려갔다. 영어를 잘해 기자회견을 몇 번 한 윤상원 씨가 기억에 남는다.

많은 가정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제공하고 쌀과 부식을 가져와 민원실 자리 2층 대회의실에서 식사를 시민들이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 당시 임시로 시신을 도청 상무관에 안치했다.

 

■ 계엄군이 광주 야산에 매장한 것 사실인가.
- 계엄군의 잔악한 살상극이 타 지역으로 알려지면 민주주의 지향하는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신군부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20전투 사단, 31사단, 상무대 병력 3·7·11공수여단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광주를 완전 포위했다. 당시 광주 인구는 80만 정도였다.


■ 5.18광주민중항쟁을 북한에서 보낸 폭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분들께 한 말씀.
- 그렇습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지만원 씨를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했고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민사소송 1심에서는 저희가 승소했다.

극우세력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당시 27살이었던 저를 황장엽으로 젊었을 때 와서 활동하다 올라가 북한 최고 지도부에 올라갔다고 하는데 1980년도 황장엽 나이가 56세다. 북한에 그렇게 인물이 없어 그렇게 고령의 특수부대를 내려 보냈을까. 몇 백명의 특수군이 내려 왔다는데 대한민국 군인은 방어하지 않았을까 어디로 왔다는 것인가. 저희들이 1년 동안 재판을 받고 고문을 많이 받았지만 북한 특수군 소속으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들은 광주에서 며칠 동안 암약하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세우는 일부 황당한 주장들은 정말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 주장을 믿지 않는다.


■ 민주주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라 절차에 의해 이뤄져 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며 획일적이거나 강압적 의사 결정이 아닌 다수의 의지가 결집돼 의사표현 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본다.


■ 와이뉴스 독자께 전하고 싶은 말씀.
- 아직도 광주의 진실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서 국방부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다시 국회에서 광주 실상을 밝히기 위해 특별법이 제정 통과됐다. 38년이 지났는데도 단편적으로나마 광주의 진실이 알려졌고 아직도 전면적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 지시한 사람이 밝혀지지 않았고 사격 지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행방불명자들이 38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에서 돌아가시고 어디에 묻혔는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더 관심을 갖고 광주의 규명하는 데 함께 해주셨으면 한다.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실 내일은 미래라고 한다. 광주 진상을 낱낱이 알아서 국민들이 알 수 있게 하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야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옛 전남도청 본관2(시민군 활동장소) 2층에 부착된 메시지들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하려는 제37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옛 전남도청 원형복원을 위한 범시도민대책위원회)가 발행한 당시 상황을 전한다.

1980년 5월 21일 새벽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됐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시신이 발견됐다. 오후 1시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 전남 일대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켰다.

시체를 둔 곳은 도청과 민원상담실이 연결된 통로 바로 밑이었다. 그곳에는 50여 구의 관들이 한 구씩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처절하고 울고 있었고 그마저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없이 관을 휘젓고 다녔다. 누가 써놓았는지 관마다 매직과 사인펜 등으로 인상착의, 옷, 나이, 성별 등이 기록돼 있었다.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양홍범 증언>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만류하던 시민들에게도 폭행을 가했다. 등교하지 목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려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에 위치한 옛 전남도청 모습이다.


21일 오후 5시 30분경 전남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막았다.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됐다.

도청 2층 회의실에서 윤상원 이양현 군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계엄군들이 도청 현관과 창문 앞에서 사과탄을 던지고 M16을 쏘아대며 ‘나와, 나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계엄군의 잔학상에 몸서리가 쳐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윤상원 군이 ‘형님 나갑시다’라고 말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갑자기 창문 뒤쪽에서 드르륵 하고 총소리가 들리더니 상원 군이 오른쪽 배를 움켜잡으며 흐느적거렸다.

오른쪽 등에서 배로 총알이 관통한 것이다. 나는 상원 군의 왼쪽 팔을 잡고 이양현 군은 오른쪽 팔을 부축했는데 뒤에서 계속 총을 갈기며 사과탄을 던졌다. 넋이 빠진 우리들은 상원 군이 ‘형님 틀린 것 같소’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그를 바닥에 눕혔다.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김영철 증언>

윤상원은 시민군 투쟁본부인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 격이었던 <투사회보> 발행인으로 활동하다 27일 도청회의실 2층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79년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이를 모티브로 한 백기완 시 <묏비나리>가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 도청 앞에는 1980년도에도 있었던 원형 분수대가 있다.


5월 27일 새벽 최후의 항쟁이 벌어졌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쳐들어왔고 시민들은 도청을 사수하려 싸웠다. 2009년 기준 사망자 163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 뒤 사망 101명 부상자 3천139명 구속 및 구금 1천589명 무명희생자 5명 등 총5천189명으로 확인된다.

<님을 위한 행진곡> - 원작 백기완 시<묏비나리> 작곡 김종률 작사 황석영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박남선 상임대표 인터뷰 영상 보기

https://www.facebook.com/100018824582219/videos/186075508696601/?id=100018824582219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