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기_어때] ㉛화성시_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2024.03.03 23:04:17

 

[와이뉴스] 제암교회는 1905년 8월 5일 아펜젤러에게 전도 받은 안종후가 자신의 집에서 예배모임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31일 제암리 인근 발안 장터에서 약 1천 명이 모여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했다. 

 

 

4월 1일 밤에는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됐고 3.1운동 보복 행위가 시작됐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몇몇 마을 사람만 발안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 강연이 있다며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도록 강제했다.

 

 

이어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총칼로 학살한 뒤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5시간가량 타올랐다고 한다. 뛰쳐나오거나 달아나는 사람들을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됐다. 일본군경의 방화로 민가 31호가 불탔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해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생존자를 만나 사건 내용 듣고 참상을 확인했다.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자 선교사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가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전송했다.

 

 

영국 영사 로이드 등도 학살 현장에 가 진상 조사를 했다. 이후 일본 내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을 첨부해 사건을 보도했다.  

 

일본기독교동맹은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했고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했다. 

 

학살사건 현장 지휘책임자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다 중위는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했다는 사유로 덮어두려다,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65년 10월 제암리 학살사건 관련 일본속죄위원들이 방문 했고 12월 속죄헌금으로 기념교회 건립의사를 표명했다. 제암교회는 1968년 2월 기념교회 설립에 동의했다.

 

1982년 9월 21일 순국선열 23인 유해를 발굴해 29일 합동장례식을 치렀고, 1983년 4월 15일 옛 초가 교회 터에 기념탑을 건립했다.

 

 

 

 

-자료참조: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문화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컴퓨터선교회, 경기도메모리, 경기문화재연구원 등 
※ 촬영: 2024.03.03. 

 

 

이영주 기자 whynew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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