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취재] 사랑과 의지로 희망 심는 굳센 발걸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국토대장정 484km를 걷다
5일차 10일 청도군 각남면사무소→대구 가창면사무소 23.16km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

사랑의 빈자리는 사랑으로 채우고 아픔 또한 사랑으로 채운다는 말이 있다. 고통을 아는 사람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는 내용일 것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6일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부산시 북구 주례동 옛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무려 486km에 이르는 그야말로 대장정이다. 이들은 22일 간의 강행군에 걸쳐 목적지까지 당도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의 사과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진정한 자유,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 규명 등이다. 10일 5일차인 청도군 각남면사무소에서 대구 가창면사무소까지 23.16km를 같이 걸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6일부터 22일 간 부산 북구 주례동 옛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484km에 이르는 국토대장정을 시행한다. 사진은 5일차 10일 청도군 각남면사무소에서 대구 가창면사무소까지 걷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하루 8시간 정도를 걸으며 적게는 18km에서 29km까지를 걷는다. 아침 8시부터 시작된 일정은 종일토록 걸어 저녁 무렵에서야 끝이 난다. 뜨거운 햇살과 내리치는 빗방울도 그들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경찰은 지자체 경계를 넘어갈 때마다 관할서 정보관들끼리 인수인계를 하며 대원들의 선두와 후미에서 에스코트하고 그들의 숙박 등 편의 제공을 위해 힘썼다.


▲ 대장정 차량의 자회전을 양쪽에서 돕고 있는 경찰 차량.

현장에서 본 그들의 걸음은 사랑의 연속이었다. 대장정을 이끄는 선두 차량 후미에는 세월호 리본이 부착돼 있었다. 이들은 대장정을 거치는 동안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시설과 피해자들을 만난다. 대구에서는 대구 희망원사건 피해자들과 대책위원회를, 세종시에서는 수용시설 폐쇄 탈시설 정책 수립을 요구하며 보건복지부를, 일제 강점기부터 ‘부랑아’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잡아갔던 선감학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해 수원에서는 경기도청을 방문한다. 이들의 걸음이 자신들만을 위한 행군은 결코 아니라는 방증일 것이다.


▲ 피해생존자들이 붓고 물집 잡힌 발을 이끌고 대장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비가 와도 우의를 입고 끝까지 걷겠다고 말하고 있다.

오후쯤 행군을 이끄는 선두의 최승우 씨는 기어이 터널을 걸어서 통과하겠다고 했다. 200m에 이르는 왕복 2차선의 터널을 굳이 걷겠다는 것은 한 걸음이라도 강인한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일행을 물리고 그와 함께 걸었다. 터널 걷는 동안 내내 그는 앞장 서 걸으며 바닥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모두 치워주었다. 보이는 족족 모두 말이다. 터널을 몇 번 걸었던 사람이라 여겼으나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터널을 걸어가 보기는 처음”이라고 털어놨다. 그 큰 소음에 쌩쌩 지나쳐 다니는 자동차가 낯설고 두려울 법 한데도 그 와중에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나뭇가지며 작은 낙하물들을 치워줬던 것이다. 그와 그의 동생은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끌려갔고 동생은 그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박순이 씨(왼쪽)가 대원의 발에 잡힌 물집을 터트려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있다.

행군 오전 대원들은 며칠 째 계속되는 강행군에 발은 붓고 물집이 잡혀 있었다. 박순이 씨는 대원들의 발을 부여잡고 불어터져 잡힌 물집을 머릿기름 바른 옷핀으로 터트려 주었다. 붕대도 감아주며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정작 본인은 다리가 불편했다. 그녀의 팔에 있는 깊은 상처 자국은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에서 생긴 상처냐고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깊은 상처만큼 심장을 후벼 파는 질문을 굳이 거기에서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일행들의 세 끼 식사를 정성으로 준비하며 설거지 및 뒷정리도 모두 도맡았다. 전적으로 그녀가 자발적으로 맡은 일이라 했다. 그녀의 부군도 짐정리를 도우며 주말을 대장정에 바쳤다.


▲ 점심 식사 후 뒷정리를 돕는 일행들. 피해생존자 박순이 씨의 부군도 주말을 오롯이 대장정에 바치며 자발적으로 합류했다.

김호상 (사)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는 첫 날 발대식에만 참가하려다 피해생존자들의 진실된 모습에 감명 받아 자신의 전동휠체어가 버틸 때까지 일행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를 보필하는 정확히는 활동을 보조해주는 강래성 지평장애인자립재활센터 사무국장은 김 대표의 일거수잍투족을 함께하며 기꺼이 그의 손과 발이 돼주었다. 그도 조금은 불편한 상태임에도 말이다.


▲ 강래성 지평장애인자립재활센터 사무국장이 김호상 (사)부산장애인인권포럼 대표에게 시원한 수박을 먹여주고 있다. 정작 강 국장도 몸이 다소 불편한 상태다.

“국가 폭력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세월호 사태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보아 왔다. 기존보다 한층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대장정의 길에 협조가 수월하다.”
한종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대표는 말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대장정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돈을 바라느냐, 왜 이제 와서 이러느냐’ 등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현재는 다르다. 기자가 동행하며 걷는 길에도 적잖은 시민들이 “힘내세요, 파이팅!”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던져줬고 또 어떤 시민은 일행을 붙들고 자세한 내막을 묻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 대장정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

한종선 대표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요구한 것은 5년 전이다. 그 때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는 한 대표에게 “자신의 글을 가지라. 당신의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라”고 제언했다. 한 대표가 그의 제안에 따라 경험을 기록했고 그는 책으로 저술됐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살아남은 아이>다.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社會福祉法人 兄弟福祉院)으로 1975~1987년까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당시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다. 3천146명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져 35명이 탈출해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됐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로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이 형제복지원의 성립 배경이다.


▲ 이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의 사과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진정한 자유,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 규명 등이다.

한 대표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1998년경에서야 비로소 문을 닫았고 그 전까지는 갖가지 다른 형태로 명칭만 바뀌어 운영되고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없어지지 않고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이름만 바뀌어 새로운 시설을 계속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박인근 원장은 형을 감형받아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201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원 내 아동 소대에 450명이 분포했고 한 소대당 70~80명이 있었다. 이들은 지원금을 받기 위한 명목으로 숫자로 표기됐고 인근 고아원 간의 교환도 이뤄졌다. 형제복지원 아이들을 다른 고아원으로 50명 “빌려주고 돈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 대표는 소회한다. 원생 수가 많을수록 지원금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된 뒤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들이 단식을 하는 등 법안 처리에 힘을 썼지만 법안은 회기 만료로 폐기돼 20대 국회에서 2016년 7월에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다시 발의됐지만 지금까지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 이들은 대장정을 거치는 동안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시설과 피해자들을 만난다. 대구에서는 대구 희망원사건 피해자들과 대책위원회를, 세종시에서는 수용시설 폐쇄 탈시설 정책 수립을 요구하며 보건복지부를, 일제 강점기부터 ‘부랑아’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잡아갔던 선감학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해 수원에서는 경기도청을 방문한다.

한종선 대표의 부친과 누이는 지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부친은 아이들을 맡아 준다는 국가를 믿고 한 대표와 그 누이를 형제복지원에 보낸 자괴감으로, 누이는 형제복지원에서의 각종 학대와 성적 유린 등의 충격으로 입원한 것이다. 한 대표를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술회한다. 한 대표는 허리디스크로 압축 붕대를 착용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힘든 걸음을 떼었다. 그래도 웃는다. 간혹 대원들끼리의 사소한 신경 대립이나 시민들의 드문 딴지에도 한 대표는 특유의 넉살스런 웃음과 성격으로 그 갈등을 수월하게 풀어낸다. 대원들도 금세 기분이 풀려 일행과 즐거운 걸음을 함께 한다. 그렇게 그들은 걷고 있었다. 사랑과 희망으로 의지를 새기며 굳센 발걸음을 청와대까지 잇고 있었다. 그들의 곪아터진 상처를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채우며.

/ 이영주 기자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국토대장정 걷는 영상
https://youtu.be/Bc-DWxfwmD8